8화 ㅣ 연재를 마치며, 두 여자의 말

2021. 5. 31. 09:01경계의 연재 서비스/딴지함 (2021.4 ~ )

서정화의 말 

 딴지함을 마무리하며 계절이 변했다. 분홍 노랑 꽃은 지고 푸른 잎이 가득하다. 그런데 변한 것은 계절만이 아니다. 내 마음 속 꽃밭에 초록 잡초가 자라났다. 멋진 기자가 되자는 이상적인 생각에 현실적 고민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딴지함을 쓰며 내 부족한 점을 마주해서 그런 듯하다.

 

 나는 복잡한 세상을 너무 이상적으로 바라본다. 연재된 내 글을 보자. 우리 현실은 이렇게 부당하지만, 다같이 으쌰으쌰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사유가 글의 절반을 차지했다. 업로드된 글을 읽으며 기자가 되고 싶다면, 이런 이야기보다 현실적 논의를 개진하는 게 더욱 맞는 게 아닐까라며 반성했다. 모두가 유토피아에 살고 싶고 예쁜 말만 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현실은 냉담하기 때문이다.

 

 또 아는 게 많이 없다. 모르는 게 많으니 같은 말만 반복하는 수밖에 없던 것 같다. 부당한 세상의 훼방꾼이 되려면 ‘지피(知彼)’가 우선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회 계층, 집, 주식을 논했지만 이중 내가 제대로 알고 쓴 글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연재의 끝엔 뿌듯함이 가득할 거라는 초반의 예상과는 달리, 이처럼 수많은 고민만 내 마음에 가득하다. ‘악한 세상아, 두고 봐라!’는 초반의 열정 넘치는 모습과 상반된다. 내가 딴지 걸린 것처럼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그렇다면 딴지함 연재를 후회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내 마음속 꽃밭에는 사실 잡초가 무성해서 꽃 뿌리가 허약했고,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망가질 밭이었다는 것을 딴지함이 알려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딴지함이 잡초를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내 밭엔 잡초가 많았던 것이다. 글을 연재하며 밭을 잘 가꾸는 법을 알아야 꽃이 무럭무럭 자란다는 힌트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지기(知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고 감사할 따름이다.

 

 앞으로도 이번에 느낀 바를 되뇌며,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부단히 노력하려고 한다. ‘백전백승(百戰百勝)’할 그날을 위해 굳은 다짐을 하며 두 달 간 여정을 마무리하겠다. 끝으로 소중한 기회 마련해준 나연이,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주신 독자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2021년 5월 31일

서정화

 

 

김나연의 말 

 약 두 달간 총 네 편의 ‘칼럼’형 ‘편지’를 썼다. 그러나 체감상으로는 꼭 열 편 정도 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마지막이라고 하면 “시원섭섭 하다”며 온갖 어려움을 포장하게 되지만, 딴지함의 마무리는 솔직히 아주 시원한 마음이 든다. 야호! 

 

 사실, 글을 쓰는 일이 생각보다 너무너무 어려웠다. ‘2주에 한 편의 글’이라는 넉넉한 연재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쉴 수 있는 틈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딴지를 걸려면 매일 부지런히 기사를 읽어야 했다. 아는 것 없이 무작정 딴지만 걸어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건설적인 비판에는 엄청난 공부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노동과 마찬가지었다. 무보수 노동에 흔쾌히 응해준 정화 언니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딴지함을 쓰며 느낀 것이 또 하나 있다. 글이나 영화, 예술 작품을 통해 “좋은 세상 만들기”나 “세상을 변화시키기”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글로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아마추어 작가가 꿈꾸기엔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아마추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2주에 한 번 글을 쓰며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글을 쓸 때면 내 밑바닥이 드러나는 느낌이었고, 나의 무지와 편견을 발가벗겨 온 세상에 드러낸다는 자의식 과잉을 경험했다. 이 고통이 더 나은 나를 위해 변화할 때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라면, 더 나은 타인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변화. 이름만 들어도 거창하고 달콤한 이것은 어떤 글이나, 영화 등에 기대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도 계속 딴지함에 편지를 써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통해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딴지를 거는 것 뿐이라고 느꼈다. 세상이 바뀌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일이 더 쉽고 빠른 데다가 심지어 중요하기까지 하니,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집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청년의 입장으로, 주식 트렌드에 탑승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금융 문맹인의 입장으로, 전체주의 한국 속에서 고통받는 개인주의의 입장으로 변화하며 글을 썼다. 글쓰기를 즐기는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개인적으로 큰 발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편지는 ‘정화 언니에게’, ‘나연이에게’ 로 시작했지만, 실제 독자는 우리 둘만이 아니었단 걸 일찌감치 독자들은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작은 노력이 신원 미상의 독자에게 닿을 수 있길 바랐다. 정기적으로 누군가 우리의 편지를 읽어주었고, 또 한 번쯤 우리 사회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달 간 오간 편지는 서투른 작가들의 고군분투쯤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앞으로는 더 발전할 수 있길 바라며. 

 

 그간 온갖 어려움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써준 정화 언니, 잦은 지각과 미흡한 글실력에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 선생님,  언제나 좋은 기사로 많은 영감을 주신 주간지 시사인, 그리고 한 발자국 나아가기 위해 애쓴 나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21년 5월 31일

김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