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ㅣ 집에는 사람이 산다

2021. 4. 26. 09:09경계의 연재 서비스/딴지함 (2021.4 ~ )

To. 정화 언니 

 언니 안녕! 지난 한 주는 어떻게 지냈어? 나는 그제와 어제, 주말을 빌려 친구들과 1박 2일로 강원도 양양에 여행을 갔다 왔어. 가서 서핑도 배우고, 멋진 바다도 보고, 석양도 보면서 몸과 마음의 재충전 시간을 가졌어. 정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어. 되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도로나 공터가 많았는데, 오히려 난 이런 ‘무(無)의 상태’가 정말 좋더라. 아파트와 상가가 빽빽하게 모여있는 수도권 지역과 달리 여유로운 양양을 바라보는 것이 정말 기쁘고 좋았어. 어떤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던데, 양양이 꼭 그러하니 언니에게도 꼭 추천해주고 싶어. 

 

 여유로운 양양에서 몸과 마음은 푹 쉬고 왔는데, 머리 속은 무지 바빴어. 여행이 끝나면 딴지함에 편지를 넣어야 하니까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야 했거든.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어떤 새로운 소재가 있을까 고민했어. 하지만 결국 최근에 가장 많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에 대해 쓰기로 했어. 그건 바로 ‘집’ 에 대한 이야기야. 

 

 한국에서 태어나 ‘청년’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도시의 문제는 집이야. 사실, 문제라기 보다는 ‘공통의 관심사’에 더 가깝지. 자동차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도로가 아닌 주차장인 것처럼, 사회적 동물로 알려진 인간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곳도 실외가 아니라 집인 것 같아. 집순이, 집돌이라는 말이 생긴 걸 보면 모든 생활을 집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진 게 느껴져. ‘오늘의 집’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이 생기게 된 것도 시대의 흐름인 것 같아. 옛날보다 사람들이 집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내가 지내는 이 공간을 더 아름답게 혹은 더 편안하게 꾸미고 싶은 욕구가 강화된 건 아닐까? 게다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모두가 평소보다 집에 훨씬 더 머물게 되면서 집에 대한 관심도가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높아진 것 같아.

 

 언니는 ‘집’을 생각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올라? 나는 햇빛이 잘 드는 방과 멋들어진 나무 책꽂이, 집 앞에 펼쳐진 마당 같은 것들이 떠올라. 어렸을 때는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상상하며 자주 그림을 그렸어. 마당엔 큰 강아지가 있고, 집은 3층 높이에, 꼭대기에는 작은 다락방도 있었어.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정도 집은 감히 내가 살 수 없는 곳이겠구나 깨달았지. 하얀 도화지에 그렸던 집은 ‘억 소리’ 나는 집이라는 걸, 그 ‘억 소리’를 내려면 금수저 집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더이상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상상하지도 않게 됐어. 그러면서 생각해봤어. 초등학생들의 연습장을 채워주던 집은 왜 그저 ‘그림의 떡’으로 머물게 되었을까? 생각보다 답변은 간단했어.

 

아. 우리 사회는 더 좋은 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그저 더 좋은 ‘부동산’을 필요로 하는구나.

 

 집과 부동산은 비슷해 보이는 개념이지만 엄연히 달라. 사전에 검색해보면 집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 이고, 부동산은 ‘움직여 옮길 수 없는 재산’이라고 정의되어 있어. 이 상이한 정의들을 보면서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집의 가치가 뭔지 확 알겠는거야. 집을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시끄러웠던 이유는 그것을 집이 아닌 ‘재산’으로 봤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 사회 시간에 배웠던 님비(not in my backyard)현상이나 핌피(Please in my front yard)현상이 함께 머릿속을 어렴풋이 스쳐 지나가면서…. 

 

 난 평소에 사람들이 ‘집’을 다루는데 참 미숙하다고 느꼈어. 물론 어떤 사람들은 꼭 브루마블 게임하듯 쉽게 집을 사고팔며 투기를 통해 재산을 불리고, 몇몇은 건물주가 되어 제멋대로 임대료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입주자를 곤란하게 하는 등 굉장히 능숙한 면을 보이긴 하지. 하지만 이들은 ‘재산’에 대해 잘 알 뿐, ‘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느꼈어. 그들은 집이라는 공간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사람의 몸이 주인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처럼, 집도 거주자의 마음을 닮아 기괴하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 그들은 이 무지가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을까? 

 

 무지의 시간 덕분에 어느새 집은 불공정 카르텔이 되었어. LH 주택 공사에서 일부 직원들끼리 신도시 개발 정보를 공유하며 몰래 ‘돈이 되는 땅’을 골라 사들인 일은 ‘집’을 매개로 어떻게 불공정이 우리 사회에서 구조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해. 돈과 지식, 뛰어난 인맥을 지닌 사람들끼리 좋은 집을 사서 그들끼리만 좋은 곳에서 잘 살겠다는 의지도 함께 보여줬지. 

 

 어느새 집은 특권 의식에 찌든 사람들의 갑질 공간이 되었어. 안전사고와 보도 훼손을 이유로 단지 내 택배 차량 진입을 금지시킨 서울의 한 아파트가 이슈화된 것, 혹시 기억해? 아파트 단지 소개 사이트를 찾아가 보니 참 잘 지은 아파트였어. 집 안에 음식물 쓰레기 이송설비가 있고, 조경이 아름답고, CCTV가 무려 500만 화소가 되는 아파트 단지. 그러나 번지르르한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자신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데, 단단히 착각한 주민들이 모여 택배 기사들에게 지상 출입 금지를 요구했잖아. 뉴스를 보고 그들의 뻔뻔함과 이기심에 기가 찼어. 자신들이 얻는 편의는 당연하고 기사들의 노고 자체는 당연하다는 마인드. 그들의 후안무치는 그들이 지불한 집값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10억 이상을 가뿐히 호가하는 집을 산다고 해서 갑질 할 수 있는 권리가 함께 따라붙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논리'로 집을 바라보고, 집을 사들이고, 집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집의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이 만연하니까, 꼭 집 안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어. 정부와 국회에서부터 집의 개념에 대해 숙고하지 않고 있는데, 어느 시민이 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부동산 법을 두고 매일 싸우는 정치의 양당 구도를 보다보 면, 이들이 정말 국민들을 위한 주거법을 만드려 노력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지기만 해. 심지어 새로 당선된 서울시장은 2009년 경찰 과잉 진압으로 6명의 철거민을 숨지게 만든 용산참사의 주역이잖아. 그는 제대로 된 사과는 커녕 “용산 참사는 임차인들의 폭력 때문”이라면서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시켜. 또 모두가 그저 서울을 더 빽빽하게 만들려고(용적률을 높이려고) 안달인 모습을 보다 보면… 이 사회에서 누가 집에 대해 제대로 숙고해볼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싶어.

 

 오늘도 세상에는 정말 많은 집이 지어지고, 무너지고 있겠지? 나는 대개 지어지는 집들보다 무너지는 집들에 더 관심이 가.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는 한 블록 블록마다 포크레인이 있을 정도로 집을 허무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야. 재개발이 흔한 인천에 살다 보면 정당한 대우나 방안을 받지 못한 채 오래된 땅에서 쫓겨나 부당함을 겪은 사람들이 만든 현수막들을 종종 보게 돼. ‘이렇게는 못 산다’ ‘000은 주민들에게 사과하라. 보상하라’ 같은 현수막들. 하지만 그런 현수막들은 이내 색이 바래지고, 비와 바람에 흔들리고 찢기다가 어느새 깔끔히 사라져. 그리고 그 위로 두터운 시멘트들이 떨어져. 시멘트 바닥 위로는 단단하고 높은 아파트 단지들이 지어져. 꼭 그곳이 원래부터 어느 누구도 살지 않던 공터였던 것처럼 아주 멀끔하게.

 

 단순히 재개발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오래된 것은 무조건 허물고 새것은 언제나 좋다.’ 는 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그보다 더 나아가서, 집은 재산이기 전에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 번은 지인의 차를 얻어 타고 인천을 지나가는데, 그분이 이런 말을 하셨어.

 

“꼭 이렇게 재개발할 때마다,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사라진다… 나는 그날 이후 거의 매일 이 말을 곱씹었어. 사람들이 사라진다니. 과연 정말 섬뜩하고도 맞는 이야기다. 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약간의 보상을 받긴 하지만, 그 보상은 새롭게 세워진 아파트를 사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이고, 그 돈으로 원래 살던 곳과 비슷한 수준의 집 조차도 찾기가 매우 어려우니까 말이야… 으리으리한 아파트를 위해 존재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휘휘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며 섬뜩해졌어.

 

사람들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짓는 집은 과연 누구를 위한걸까. 돈과 권력을 위한 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파트 투기', '땅 사재기' 같은 문제는 단순히 집을 재산으로 바라봐서 문제인 게 아니라, 집은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에 심각한 문제인 것 같아. 지금은 다양한 모양의 집이 있을 때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 때 더 활발하게 평등의 개념이 논의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논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집은 가난과 부를 나눠 차별을 정당화하는 공간이 돼선 안된다는 것. 부동산 이익보다는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 돈이 아닌 '사람을 위한 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등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들이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는 사회에서 하루빨리 '집과 사람의 존엄'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긴 편지를 써. 앞으로는 획일화된 모양의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다양한 채소와 토핑이 섞인 샐러드처럼 여러 모양의 집들이 조화롭게 생기고 또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From. 나연